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폐비 윤씨 (문단 편집) === 최후 === >의정부(議政府)에 전지(傳旨)하기를,[br]“폐비 윤씨는 성품이 본래 흉악하고 위험하여서 행실에 패역(悖逆)함이 많았다. 지난날 궁중에 있을 적에 포악(暴惡)함이 날로 심해져서 이미 삼전(三殿)에 공순하지 못하였고, 또한 과인(寡人)에게 흉악한 짓을 함부로 하였다. 그래서 과인을 경멸(輕蔑)하여 노예와 같이 대우하여, 심지어는 발자취까지도 없애버리겠다고 말하였으나, 이러한 것은 다만 자질구레한 일들이므로 더 말할 것도 없다. 심지어는 일찍이 역대(歷代)의 모후(母后)들이 어린 임금을 끼고 정사를 마음대로 하였던 일을 보면 스스로 기뻐하고, 항상 독약을 스스로 가지고 다니면서 혹은 가슴 속에 품거나 혹은 상자 속에 간수하기도 했으니, 비단 그가 사람을 제거하려는 것뿐만 아니라 장차 과인에게도 해로운 것이다.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오래 살게 되면 장차 할 일이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부도(不道)한 죄로서 종묘와 사직에까지 관계되는 것이지만, 오히려 대의(大義)로써 차마 단죄(斷罪)하지 아니하고, 다만 그를 폐비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아 사제(私第)에 있게 하였다. 그런데 이제 외부(外部)의 사람들이 원자(元子)가 점차 성장하는 것을 보고는 앞뒤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대면서 이 사건을 말하는 이가 많다. 이는 비록 지금은 그리 깊이 염려하지 않아도 되겠지마는, 후일 있을 화(禍)를 어찌 이루 다 말하겠느냐? 그가 만일 흉악하고 위험한 성격으로 임금의 권세를 잡게 되면, 원자(元子)가 현명하더라도 그 사이에서 어떻게 하지를 못하여서, 발호(跋扈)하는 뜻이 날로 더욱 방자하여질 것이다. 그리하여 한 여후(漢呂后)와 당 무후(唐武后)의 화(禍)를 열망하여 기다리게 될 것이니, 나의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참으로 한심하다. 이제 만일 우유 부단(優游不斷)하여 큰 계책을 일찍이 정하지 아니하면, 나라의 일이 구제할 수 없는 데까지 이르러 후회(後悔)하여도 미치지 못할 것이니, 내가 참으로 종묘와 사직의 죄인이 될 것이다. 옛날 구익 부인(鉤弋夫人)은 죄가 없었지만 한 무제(漢武帝)가 오히려 만세(萬世)의 계책을 위하여 〈그를 죽였는데〉, 하물며 이 흉악하고 위험한 사람 또한 용서하기 어려운 죄가 있음에랴? 이에 금년 8월 16일에 그 집에서 사사(賜死)한다. 이는 종묘와 사직을 위하는 큰 계책으로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서울과 지방에 포고하라.”[br]하였다. >---- >[[성종실록]] 144권, 성종 13년 8월 16일 임자 3번째기사 [[폐위]] 전날 왕은 아직은 중전이던 윤씨에게 하례를 금지하는 어명을 내렸다.[* [[http://sillok.history.go.kr/id/kia_11006001_001]]] 이 무렵 둘째 아들을 낳은 중전은 왕에게 [[싸대기]]를 맞았다며 아들들을 데리고 [[함안 윤씨|친정]]에 가겠다는 편지를 보냈고, 왕은 이 편지를 받고는 분노하여 자신은 중전을 때린 적도 없는데 왜 멋대로 자식들을 데리고 [[함안 윤씨|친정]]에 가냐고 항변하면서[* 멋대로 왕의 자식들(그것도 1순위 계승자인 원자까지)을 데리고 친정으로 가겠다고 선언한 것은 국왕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며 [[역모|반역]]으로 간주될 수 있다. 왕족이 궁 밖을 나가 지내는 건 아프거나 주변에 전염병이 돌아 피접을 나가는 경우가 아니면, 왕의 마음에 안드는 죄인이니 궁에서 거주하지 못하겠다고 어필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왕의 주장처럼 중전이 [[싸대기|따귀]]를 맞았다고 '''거짓말'''한 거라면, 왕비가 국왕을 [[가정폭력|가정폭력범]]으로 모함한 [[무고죄]]와 [[강상죄]]급의 발언이다.] 두 아들을 두고 궁에서 쫓겨나 친정살이를 하고 있던 중전은 그 날로 [[폐위]]되었고, 궁에 두고 온 젖먹이 차남까지 백일도 안 되어 갑자기 사망했다. 왕뿐만 아니라 대비들까지 나서서 [[폐위]]의 정당성을 설명해야 했던 이유는 신하들의 반대가 워낙 거셌기 때문이다. 왕이 영원히 살 것도 아니고[* 실제로 성종은 폐비가 처형된 지 13년 뒤인 40세도 되지않은 '''37세'''에 사망하면서 당시 기준으로도 [[요절]]했다.] 그 다음에는 [[연산군|폐비의 아들인 원자]]가 왕위에 오를 텐데, 그 원자의 어머니의 폐위와 사사에 관여했다는 의심을 사면 [[갑자사화|멸문지화]]를 당할지도 모를 일이니 신하들은 한뜻으로 그냥 왕이 끝까지 참고 살길 바랐다. 그리고 후계 문제도 있다. 죄를 저질러야 폐위당하는 만큼 폐비가 되었다는 것은 죄인이라는건데 죄인이라는 꼬리표가 자식에게도 영향이 간다는게 문제. 즉 이후에 왕으로 즉위하는 왕세자에게도 분명한 약점이 된다. 그나마 왕이 이 문제를 잘 수습했기 망정이지 혹시라도 문제를 잘 수습하는데 실패했다면 폐비 소생의 세자와 제2 계비인 [[정현왕후]] 윤씨 소생의 진성대군([[중종(조선)|중종]])의 대립구도로 갈 수도 있다. 멀리갈것 없이 중종 말기 [[대윤]]+세자([[인종(조선)|인종]]) VS 소윤+경원대군([[명종(조선)|명종]]) 구도가 딱 비슷한데 세자는 어머니인 [[장경왕후]]가 생전에 저지른 잘못이 없었지만 자신을 낳고 죽어버려 생모가 없다는 문제점에 기껏 새로 들어온 [[문정왕후]]는 아들을 낳기 전에는 조용했지만 아들을 낳자마자 돌변해버렸고 여기다가 왕도 대윤 수장인 윤임이 아니라 소윤 핵심인 윤원로, 윤원형 형제를 총애하며 심지어 세자의 지위를 흔들뻔한 명령을 내리기도 해서 인종의 입지가 약해지기도 했으니 아주 허황된 얘기는 아니다. 당시 인종과 경원대군의 나이차는 연산군과 중종의 나이차보다 많이 나고 서로간의 사이는 좋았는데도 이정도다. 즉 웬만하면 한번 맞이한 왕비와 백년해로 해야 후계구도가 꼬일 여지가 줄어든다. 폐위 후 왕은 [[이세좌]]를 보내 '''[[사약]]을 내렸고''' 윤씨는 폐위된지 3년만에 [[사사]](賜死)된다. 폐비의 죽음에 대비와 후궁들이 관여했다는 건 [[야사(역사)|야사]]와 [[드라마]] 각색으로 널리 퍼진 오해로 실제로 중전을 폐위하고 처형하는데 가장 앞장서고 밀어붙인 사람은 왕이었고 대신들은 반대 분위기가 역력했다. 당시 신하들 사이에서는 폐비에 대한 동정론이 우세했고 왕을 욕할 순 없으니, 많은 [[야사(역사)|야사]]에서 불쌍한 폐비가 악독한 시어머니와 왕의 [[후궁]]들에게 시달리다가 [[사사]]당했다고 묘사된다. 폐비가 죽을 때 피를 토했고 자신의 [[피 묻은 적삼]]을 어머니에게 주며 후에 이것을 훗날 [[연산군|자신의 아들]]에게 전해달라 말을 남기고, 친어머니의 존재를 모른 채 장성하여 즉위한 연산군이 이를 계기로 폭군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정사처럼 여겨져 왔으나, 이 또한 실록에는 자세한 기록이 없고 야사에 나온 기록이기에 진위가 확인되지 않는다. 연산군을 다룬 각종 [[드라마]] 등에서 극적인 표현을 위해 반드시 쓰는 필수장면이 되는 바람에 인식이 박혔다. 아들인 [[연산군]] 때 '제헌왕후(齊獻王后)'로 다시 복위되고 능도 보수하여 '회릉(懷陵)'이라고 불렀지만, [[중종반정]] 이후 호칭을 되돌렸다. 대신 묘를 부수진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